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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5일 새벽설교 요약
    2026-05-15 06:10:00
    안은경
    조회수   17

    본문 : 고린도전서 4:14-21
    제목 : 말이 아닌 삶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라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 가장 힘든 교회였습니다. 분쟁이 있었고, 교만이 있었고,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정죄가 아니라 권면이었고,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스스로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습니다(4:8). 그들은 영적 은사를 자기 성취의 표지로 이해했고, 바울의 고난과 약함을 사도적 권위의 결핍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 자체를 오해한 신학적 왜곡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장 14절에서 21절은, 바울의 신학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이 담긴 본문입니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복음으로 세워진 공동체가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14-15절 말씀에 복음은 아버지를 세웁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한 단어를 씁니다. "자녀"라는 단어입니다.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은 그 이유를 15절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낳았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출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탄생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라 말합니다.
    15절의 대조가 중요합니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스승은 많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 이론을 설명하는 사람. 그러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스승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낳습니다. 스승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명을 나눕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실력이 넘어서면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많은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있었고, 게바가 있었고, 수많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으로 너희를 낳은 사람은 나뿐이다."
    이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책임의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잘못될 때 못 본 척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교만해질 때 방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날카로운 말을 쓴 것은, 그에게 아버지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에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강의를 잘 하는 사람,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누군가를 낳고,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잘못될 때 아파하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사람.
    그런 아버지가 있는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 공동체는 지식의 교만보다 사랑의 깊이로 자랍니다.


    복음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복음이 살아있는 곳에는 반드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그 깊은 유대가 있습니다.

    16-17절에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집니다 
    16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요청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것은 대단히 담대한 말입니다.
    나를 보라는 말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 자신의 삶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4장 앞부분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는 배고팠고, 헐벗었고, 욕을 먹었고, 박해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축복하고, 참고, 권면했습니다. 그의 삶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내가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따르는 그분을, 내 삶을 통해 보아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본받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17절이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바울은 왜 디모데를 보냈습니까?
    말로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리라." 행사입니다. 살아온 방식, 행동, 삶의 패턴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곁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감옥도 함께 갔고, 박해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 삶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복음은 강의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삶으로 전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까이서 본 사람,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함께 목격한 사람, 말보다 삶이 먼저였던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것은 교과서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증거를 보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삶은 복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과 삶이 일치하는 자리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18-21절 말씀에 복음의 사랑은 단호함과 온유함을 함께 품습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멀리 있으니까 괜찮아. 편지만 쓸 뿐이야."
    그들은 바울의 부재를 자신들의 교만을 정당화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에 바울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19절,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너희에게 나아가겠다."
    그리고 무엇을 알아보겠다고 합니까?
    "교만한 자들의 말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겠고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리라."
    바울은 말을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능력을 보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20절에 복음의 핵심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말이 많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말, 남을 판단하는 말, 지식을 과시하는 말.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단순한 기적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 실제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 원수를 사랑하는 힘, 고난 중에 인내하는 힘, 낮아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 이것이 두나미스입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복음이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 너희의 말이 아니라 너희의 삶을 보겠다."
    이것이 복음의 아버지가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놀라운 선택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매를 가지고 오는 것과 사랑과 온유함으로 오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바울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필요하면 단호하게 책망할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선택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너희가 돌아오면, 나는 사랑으로 간다. 너희가 완고하면, 나는 단호하게 간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단호하고, 단호하지만 그 안에 온유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단호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징계는 버리심이 아닙니다. 징계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쓰고, 단호하게 경고한 것은 그들을 포기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한 단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습니다.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면하기 위해 썼습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보여줬습니다.
    단호하지만 그 안에 온유함을 품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바울이 만난 복음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단호하게 죄와 맞서셨지만, 온유하게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그 복음을 만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바울 안에서 흘러나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에 이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납니까, 아니면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단호함과 온유함이 함께 있는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질문도 드립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영적 아버지, 영적 어머니가 되어있습니까?
    혹은 나는 지금 그런 아버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복음이 살아있는 곳에는 이 관계가 살아있습니다.
    정보를 넘어, 지식을 넘어, 복음으로 낳고, 삶으로 보여주고, 사랑으로 품는 아버지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이 흘러넘치는 공동체,
    아버지의 마음으로 서로를 품는 공동체, 그것이 바울이 꿈꾼 고린도 교회였고,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아버지가 됩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우리의 삶이 말보다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단호함과 온유함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공동체를 통해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간구하는 교회, 그 능력 안에서 복음으로 낳고 낳기를 멈추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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